로마의 탄생과 에트루리아 미술의 영향
본문 바로가기
미술이야기

로마의 탄생과 에트루리아 미술의 영향

by DDing선생 2023. 9. 3.
반응형

그리스의 시대가 끝나고 로마가 유럽의 중심이 되는 시대로 넘어갔다. 그리스가 서양 문명의 씨앗을 만들었다면 로마는 그 씨앗을 유럽과 전 세계로 퍼트리고 수확을 이루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로마의 탄생에는 어떤 과정이 있었고 이들의 문화와 미술은 어디서 영향을 받았을까? 

로마의 탄생과 에트루리아 미술의 영향

로마의 탄생

로마는 기원전 753년 이탈리아 내륙 티베르강 근처 일곱 개의 언덕 가운데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 위에 만들어졌다. 이탈리아 티베르강가에 부족 형태로 건립된 로마는 그리스 시대부터 전해지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 사람들이 자신들이 트로이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리오의 영웅 아이네아스를 자신의 선조라고 여겼는데, 이는 트로이의 왕자 아이네이스가 나라의 멸망 이후 떠돌며 겪은 이야기를 담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아스>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아이네스가 지금의 로마 근처에 정착해서 나라를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마치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와 흡사한 건국신화처럼 보이는데,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인물이라고 한다면 로마를 세운 인물은 아이네이스가 아닌 '로물루스'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로마의 탄생과 에트루리아 미술의 영향
<로마 건국신화의 주인공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늑대의 젖을 먹는 모습/청동상/ 카피톨리노박물관, 출처: 위키백과>

'위 작품 <늑대상과 로물루스>에서 늑대상은 기원전 500년경인 에트루리아 시대에 제작된 것이며,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의 상은 르네상스시대인 15세기경 조각가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에 의해 만들어 합체된 것으로 전해진다.'

 

아이네아스의 후손이자 마르스의 쌍둥이 아들로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태워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외삼촌 아물리우스의 흉계에 빠져 죽음을 맞을 상황이 되었지만, 이들을 불쌍하게 여긴 시종이 두 갓난아이를 티베르 강에 버리게 된다. 

 

티베르 강의 신은 이 둘을 안전히 강가로 옮겨주었고, 이를 발견한 늑대가 형제에게 젖을 먹여 키웠다. 이 둘은 양치기 부부에 구출된 뒤 장성하였고, 일곱 개의 언덕 중에 하나인 필라티노 언덕에 '로마'라는 나라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두 형제는 불화가 생겨 다투게 되고, 형인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고 일인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로마'라는 국가명이 나라를 세운 '로물루스'로부터 차용되어 만들어졌다고 전해져 있다. 하지만, 로마가 생긴 후에 국민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신화'와 같은 스토리가 필요했고, 거기에 주인공의 이름을 '로마'로부터  가져온 '로물루스'로 지었다는 의견도 있다. 전설 따라 삼천리~~

 

그리스, 로마 그리고 에트루리아

로마를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는 에트루리아와 그들의 문화적 흔적을 짚어보아야 한다.

 

기원전 650년, 지금 이탈리아 반도 영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민족은 에트루리아 민족인데, 로마 역시 에트루리아 민족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만큼의 찬란한 문화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의 독특한 발전을 이루었다.

 

에트루리아 인들의 문화적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으로 먼저 '체르베테리 네크로폴리스 유적'을 꼽을 수 있다. 로마보다 강성하던 시절 에트루리아의 귀족들의 공동표지인 이곳은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총면적이 무려 40여 ha에 이르며 화산암을 잘라 만든 포장길과 거대 무덤들과 석조 구조물을 통해 여기가 도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각각의 고분은 무덤이라기보다 하나의 주택으로 보일 정도로 거실, 여러 개의 방, 복도, 침대 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기둥이나 벽에는 무덤에 묻힌 사람의 생전의 모습 등을 새긴 부조 또는 그림이 있으며, 죽은 이의 영혼을 지키는 동물의 형상을 한 조각품이 있는 고분도 있다. 

로마의 탄생과 에트루리아 미술의 영향
<체르베테리 유적은 암석을 깎아 만든 석실묘, 투물리(분묘), 오두막이나 가옥 형태 총 3가지 양식이 있다./라티움 지방 로마와 비테르보 시, 출처: 유네스코와 유산>

이 체르베테리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 '부부 관 뚜껑'은 에트루리아의 장묘 문화와 남녀의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리스가 남성 위주의 작품이 월등히 많으며 그 묘사법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었던 반면 이 작품을 통해 에트루리아의 작품에서 남녀 간의 차이가 거의 없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의 탄생과 에트루리아 미술의 영향
<에트루리아의 부부 관 뚜껑으로 테라코타 양식이다/루브르박물관, 출처: 위키피디아>

침대에 반쯤 누워서 연회 하는 모습의 이 작품은 소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모습으로 에트루리아 인들이 동양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하며, 그리스가 연희를 남성에게만 허락했던 반면 이렇게 남녀가 함께 연회에 참석한 모습은 에트루리아는 그리스와 차이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테라코타 양식은 그 당시 무덤과 건축장식에 주로 사용했던 재료로서 주변에 돌이 부족해서 보다 표현이 유연한 진흙을 선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트루리아의 조각은 그리스의 쿠로스와 비교를 통해 어떤 점이 이들에게 전파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로마의 탄생과 에트루리아 미술의 영향
<(좌)그리스의 크로이소스 쿠로스/아테네국립박물관,출처:위키피디아, (우)베이의 아폴로/국립에트루리아박물관, 출처:위키피디아>

그리스의 쿠로스가 석재를 이용한 반면, 에트루리아의 조각은 테라코타 방식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으며, 쿠로스가 차렷자세로 양손을 다리에 붙인 반면, 베이의 아폴로는 훨씬 자유로운 동작을 하고 있다. 또한 베이의 아폴로가 옷과 머리의 장식을 통해 그리스의 쿠로스에서는 볼 수 없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두 작품의 얼굴에 담은 미소 외에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에트루리아인은 그 기원부터가 미스터리하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소아시아인들이 기근을 피해 서쪽으로 피해와서 자리 잡은 리디아인이라고 했으나, 할리카리나소스의 디오니소스는 이들이 원래 이탈리아 반도에 살고 있던 원주민이라고 하였다. 기원전 768년에서 기원전 264년까지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에 세력을 떨친 이들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들이 그리스를 비롯한 다양하고도 많은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 유산이 로마가 찬란한 문화를 이루고 전파하는 데에 중요한 다리가 되었음에는 분명해 보인다. 

반응형